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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간/자유공간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

 

이스라엘의 성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중동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이 1차대전 이후 중동을 획득하는 과정과 이에 대한 관리가 현재 이스라엘이 가지는 문제는 설명할수 있는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죠.

 

주요사건 일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5  후세인-맥마혼 서신교환

1916  사이크스-피코 협정

1917  밸푸어선언

1920  산레모 회의 

1922  이집트 독립

 

 

 

 1차대전 전에  마카의 샤리프인 하심 왕조,후사인 이븐 알리는 투르크와 전쟁이 벌어질 경우 영국과 연합하자는 논의를 주선, 1915년 맥마혼과 서신을 교환하게 되어, 1916년 6월 헤자즈의 아랍인을 동원해서 아랍반란을 일으킬 토대를 마련합니다. 후세인은 영국이 전쟁 후에 아랍을 독립시키는데 동의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1916년 5월 9일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비밀협정 사이크스-피코협정에 의해 이런 기대는 좌초되게 됩니다. 이에 더해 1917년 11월에는 이스라엘 건국의 시초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밸푸어 선언이 등장하게 되죠.

 

Map of Jordan and Palestine at 1923 showing the British and French mandated territories

영국이 차지한 팔레스타인 지역. 동쪽은 트란스요르단으로 분리됩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시작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 성립을 호의적으로 검토한다"(출처 : CHarles D. Smith , Palestine and the Arab-Israeli conflict, 2nd edn (New York, 1992), p54 )는 밸푸어 선언은 시온주의자의 대의에 대한 진실한 동조이기보다는 편의주의에서 나왔다고 할수 있습니다. 밸푸어 선언을 통해, 미국과 러시아의 유대인들이 독일에 대한 전쟁을 좀더 적극적으로 수행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하길 바랬던 것이죠. 그러면 영국은 전쟁 부담을 줄이게 되니..

 

 "러시아와 아메리카에 사는 유대인의 대다수는 그리고 세계 도처에 있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현재 시온주의에 호의적인 듯하다. 우리가 그러한 이념에 찬성하는 선언을 내놓을 수 있다면, 러시아와 아메리카 양쪽에서 극히 유용한 선전을 실시해 나갈수 있을 것이다.  "(출처 : Bermard Porter, The lion's share : a short history of British imperialism, 1850-1995, 3rd edn(London, 1996) p251)

 

 1차대전이 끝난후, 영국은 무리하게 발행한 약속어음들을 정리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랍국가들의 독립은 산레모 회의로 좌절되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지역은 영국이 위임통치하게 됩니다.

 

1921년 팔레스타인 동부는 트란스요르단으로 개칭해서 아브둘라 이븐 후세인이 통치하게 되며, 후세인의 또 다른 아들인 파이살 1세가 이라크의 왕이 되게 됩니다. 이중 이라크는 성공적인 관계가 되었으나 팔레스타인은 문제가 생기게 되었죠.

 

 1920년 6월 식민장관 윈스턴 처칠은 다음과 같은 우려를 처음부터 제기하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사업은 철회하기 가장 어려우며, 어떠한 물질적 이득도 산출하지 않을 것이 확실한 사업이다. "(Michael J.Cohen, Palestine to Israel : from mandate to independence (London, 1988), p2)

 

1921년 5월 아랍인들과 유대인 이주자들 사이에 난동이 발생하자 처칠의 우려는 정당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1929년 8월에는 예루살렘 서부 방벽에 대한 분쟁이 확대되어 133명의 유대인과 116명의 아랍인이 죽게 됩니다. 하지만 유대인 이주는 제한되지 않고 계속되죠.

 

 


후사인 이븐 알리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5h3173a

 

1차대전중 아랍반란을 지도했던 후세인은 1916년 10월 아랍국가들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1924년 3월 칼리프로 선언하지만, 이븐사우드에 의해 헤자즈를 잃고 키프로스로 가게 됩니다.

 

이븐 사우드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3460b

이븐 사우드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창건자죠.

 

사이크스-피코협정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1s0664a

 

밸푸어선언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9b1047a

 

시온주의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3s2054a

 

산레모회의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1s1183a

 

아브둘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4a1634a

 

아브둘라는 아랍통치자들 중 유일하게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과 아랍국으로 분할한다는 국제연합(UN)의 결의(1947)을 받아들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가 1921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트란스요르단을 분리시켜 왕이 된 사실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를 일이죠.

 결국 웨스트 뱅크 지역을 요르단의 일부로 합병한 일 때문에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와도 사이가 나빠지고 (이들은 팔레스타인 아랍국가 건설을 기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파이살 1세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3p0952a

 

파이살 1세는 원래는 영국과 맺은 협정에 의해 시리아의 국왕이 되었으나 프랑스의 군사력에 의해 1920년 7월 다마스쿠스가 점령당하고 망명, 그후 영국이 영향력을 확보한 이라크에 대한 간접통치정책의 일환으로 1921년 8월 이라크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1937  필위원회

1939 팔레스타인에 관한 백서

1948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포기함

 

 

1936년 영국의 방치하에 팔레스타인 유대인 주민수는 전체 인구 133만 6518명 중에서 37만 483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아랍인들의 분노를 사는데 성공해서 1936년 4월 아랍인들의 반란을 불러오게 되고, 1937년 불화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필위원회에서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유대 국가, 성지(聖地)를 포함하는 중립지역로 나누자는 제안이 나와 더욱 격렬한 반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영국의 정책전환.. 친시온주의에서 이주제한으로

 

하지만 이때부터 영국의 친시온주의적 태도는 수정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1935년 10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한 것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받은 것이며, 인도-이집트 경로에서 인도-팔레스타인 경로라는 전략의 변화로 인한 팔레스타인과 아랍의 문제해결 측면이라는 점도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팔레스타인 문제를 주로 국제 상황에 미칠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우리가 어느 한쪽의 분노를 살 수 밖에 없다면, 아랍인보다는 오히려 유대인의 분노를 사도록 하자." (수상 네빌 체임벌린 . Cohen, Palestine to Israel, p121)

 

이에 따라 1939년 영국은 5년 기한 동안유대인 이주를 7만 5천명으로 제한하고, 그 이후 더 이상의 유대인 정착은 아랍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백서를 1939년에 발행하게 됩니다. 또한 영국은 다수파인 아랍인들에게 10년안에 독립시키겠다고 제안하죠. 하지만 이것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인해 없던 일이 되고 맙니다.

 

 어느정도의 동정심과 한편으론 시온주의자의 표를 얻기 위해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1945년 8월 31일 영국 수상 클레멘 애틀리에게 10만명의 유대난민들을 즉각 팔레스타인에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글을 보냅니다. 

 이를 보고 영국은 미국의 비판자들을 팔레스타인 문제에 끌어들이려고 1945년 11월 영미조사위원회를 설립해서 정책을 조화시키려고 했죠.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내 화를 돋우는 것은 미국인들이다. 그들은 도움을 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거운 부담을 지우고 있다. "(영국 수상 애틀리, William Roger Louis, The British Empire in the Middle East, 1945-1951 : Arab nationalism, the United States, and postwar imperialism (Oxford, 1984), p419 )

 

 2차대전후 영국의 이주제한 정책은 유대인 시온주의자 군사조직인 하가나에 의한 테러주의 활동에 직면하게 되고, 영국은 8만명의 군대를 파견합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의 혼란은 점점 심해졌고,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전략적 가치의 소실과 주둔비용의 막대함(연간 4천만 파운드)로 인해 1947년 2월 14일 국제연합(UN)에 회부시키게 됩니다.

 

  어니스트 베빈 :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 정부의 정책 설명 , 1947년 2월 18일

 영국정부는 위임 통치의 조건 아래서 아랍민족이나 유대민족 어느한쪽에 팔레스타인을 부여하거나, 심지어는 그들 사이에 영토를 분할할 권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아랍인에 의해서건 유대인에 의해서건 제출된 계획을 수용할 수 없으며, 또는 우리 자신의 해결책을 강요할 수도 없다고 결정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열려있는 유일한 진로가 이 문제를 국제 연합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는 영국 정부가 지난 25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위임받은 바를 수행해 온 방식에 관한 역사적 설명을 국제 연합의 국가들에 제공하려고 한다. 우리는 위임 통치가 실제로 운영되기 어렵다고 판명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두 공동체에 대하여 떠맡은 의무가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할 것이다.

(Frederick Madden and John Darwin eds., Dependent empire, 1900-1948: colonies, protectorates, and mandates(Westport, 1994) p 624)

 

 

 그동안 영국은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이 이주하는 것을 막기위해 노력합니다. 국제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유대난민들을 그들의 출발지로 돌려보내기도 하면서 말이죠. 한편 유엔 팔레스타인 문제 특별위원회는 팔레스타인의 분할과 유대인 국가의 창설을 촉구하고, 영국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은 그 계획을 '아랍인들에게 명백히 불공평할 것'이라고 평가하고, 9월 20일 내각에서 그것을 거부할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자고 설득하게 됩니다.

 베빈은 철수의 이점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했죠. "팔레스타인의 한 공동체에 유리하도록 다른 공동체를 억압하는 데 있어서, 영국인이 생명을 잃거나 영국의 자원이 소비되는 일이 없다."(Michael J. Cohen, Palestine and the great powers,1945-1948 (Princeton, 1982), p275  )

 

"팔레스타인에서 합의된 해결에 도달할 수 없다면, 그 지역은 영국 정부에 전혀 전략적 가치가 없으며, 그곳에 영국 군대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재정 자원에 과부하를 낳을 뿐이다. "(재무장관 휴고 돌턴, Cohen, Palestine to Israel, p237)

 

 결국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에서 영국군은 철수하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국가 선포, 뒤이어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혼란 속에 수십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난민이 되고, 아랍 연합군대는 패배하게 되죠. 물론 영국은 철수로 인해 골치아픈 문제에서 벗어나게 되지만(아랍과의 전쟁이나 공격의 위협에서도 벗어나죠.) 아랍 세계에 적개심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

 

 물론 팔레스타인 분할과 유대인 국가 창설에는 영국의 이런 철수정책뿐 아니라, 미국, 소련등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미국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분할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스탈린 역시 키부츠에 대한 관심인지 이스라엘에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죠.

(소련에게는 중동지역에서 영국 견제, 미국은 그 목적과 유럽의 실향민 문제 완전 해결이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소련은 더구나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많은 무기를 이스라엘에 넘겨주게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에 큰 도움이 되죠. (프랑스도 넘겨주긴 합니다. 영국때문에 시리아를 잃었다는 생각때문에)

 

 

 이스라엘의 독립엔 운이 많이 따릅니다. 유대인표를 무시할수 있는 루즈벨트가 미국대통령이 아니었고, 냉전이 본격화 되기 전이라서 정치적 현실주의를 벗어나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트루먼은 또 원래부터 친시온주의자에 반아랍민족주의자라서 효과는 증폭되기까지 했죠. (정치적 기반이 약해서 시온주의자 표도 필요했죠.)

 

 그렇다고 소련이 반대한 것도 아니라 스탈린도 왠지 호의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무기를 넘겨주기 까지 하면서 말이죠. (키부츠에 스탈린이 관심이 많았다고..)

 

 영국이 2차대전이후 무능했던 것도 뭐 좋은 조건중 하나겠죠. 뭐 이건 수에즈 위기로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영국이 아랍을 지원했으면서도 아랍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건 스폰서가 좋지 않은 탓도 있겠죠.

 

 마지막으로 서독 아데나워 정부가 유대인협회(정식 명칭은 '대 독일 배상금 청구를 위한 유대인 협회')에 5억 마르크를 10년에 걸쳐 지급하고(이스라엘 밖 거주), 이스라엘에는 7억 1000만 달러를 배상금으로 (그당시 10억달러가 43억 마르크에 해당) 지급한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필위원회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3p0952a

로버트 필 경이 위원장. 정식 이름은 영국 팔레스타인 조사위원회(Royal Commission of Inquiry to Palestine). 

 

하가나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4h1725a

(히브리어로 '방어'라는 뜻)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대다수를 대표하던 시온주의자 군사조직(1920~48).

 2차대전 말기까지는 온건한 조직이었으나 2차대전후 영국이 유대인 이주를 막자 테러주의 활동으로 선회했고, 1947년 UN의 분할 결정 이후에는 방위군으로 발전, 1948년엔 해체후 이스라엘 군대에 포함되게 된다.

 

해리 트루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2t4005b

1948년 5월 해리 트루먼은 이스라엘 독립 선포 불과 2시간 후에 이스라엘을 승인하여 이스라엘의 성립에 도움을 주며, 그 이전 1947년 10월 팔레스타인 분할안 유엔 통과시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도움을 줍니다.

 

키부츠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2k1158a

 

벤구리온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9b2484a

일명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폴란드 출신 유대인으로 1906년 팔레스타인에 들어가 유대인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많은 활동을 했으며, 1948년 5월 이스라엘 공화국 탄생과 함께 초대 총리가 되었습니다.

 

모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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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에는 정보기관으로 나와 있는데, 본래는 2차 세계대전 기간중에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고 있던 영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럽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추진했던 지하조직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모사드는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유대인들의 집단이주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영국의 감시망을 피해 유럽 각지의 난민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작전을 감행했으며, 1951년 총리직속으로 편입되면서 중앙정보기관으로 성격이 바뀌게 됩니다.

 

 

이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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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군 즈바이 레우미(유대 정치단체)  

별칭은 ETZEL (히브리어로 '민족군사조직'이라는 뜻)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이 된 것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단체라고 할 만한 곳입니다. 다이르 야신(지금의 케파르샤울)이라는 아랍인 마을을 기습해 주민 254명 모두를 살해한 사건은 꽤 유명한 것이죠.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아랍정치조직에 의해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했다는 설을 근거없게 만드는 단체이기도 합니다.

 

 

참고서적/출처

영국제국주의  1750-1970                      사이먼 C. 스미스    역 이태숙, 김종원    2001년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최호근  푸른역사 2006년

갈등의 핵 유태인                                   김종빈  효형출판 2006년

정복의 법칙                                           데이비드 데이       역 이경식     휴먼액 북스 2006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번외편 :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정체성

 

1983년 5월 여론조사기관인 스미스 연구센터에서 홀로코스트에 관해 조사한 이스라엘인들의 태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홀로코스트로부터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에게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는 주장에 87%가 동의했으며, 61%정도는 홀로코스트를 이스라엘 건국의 주요한 요소로 생각, 62%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그 같은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막을수 있을 것이라 믿게 됩니다.

 

이것은 1951년 당시 통계로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1/4 이 나치의 학살을 피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것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이면엔 1949년까지 아랍인 인구의 85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70만명이 자발적 혹은 강제로 이스라엘을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죠. 그래도 이스라엘 국경선 안에는 16만명이나 되는 아랍인들이 남아있었지만 그들은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던 아랍인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막고, 무단 월경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또 전쟁 동안에 일시적으로 비었던 아랍 마을을 완전히 폐쇄하는 등의 일들을 서슴없이 저지르던' 군사정권 아래에서 1960년까지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내 아랍인 출산율이 매우 높아서 현재 이스라엘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은 뭔가 아이러니한 일일까요.

 


 

 

요약

1. 이스라엘 성립의 기초는 영국의 정책추진으로 인해 이루어집니다. 이는 시온주의에 동조라기 보다는 1차대전중 편의주의에 기초한 것입니다.

2. 팔레스타인이 골치아픈 문제라는 건 초기부터 계속 나오게 됩니다.

3. 영국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대로 움직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철수후 남겨질 아랍인과 유대인 문제는 영국으로서는 신경쓸게 아니죠. 

4. 트란스요르단이 다른 아랍과 따로 노는건 아브둘라 이븐 후세인의 영향이 큽니다. 쉽게 분류하면 중동전쟁 초기 당시 트란스요르단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반대, 나머지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찬성.

5. 아랍 통합을 노리던 후세인 일가의 꿈은 이븐 사우드에 의해 박살.

6. 이스라엘 정체성확립과  영토소유권의 핵심중 핵심은 나치대학살이죠. 비난에도 써먹는 만능방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