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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간/자유공간

베트남,알제리는 어떻게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는가?

 

 알제리의 독립은 베트남과도 연결되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단히 베트남 독립에 관련되어 살펴보고자 한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재래식 접전에서 프랑스는 분명히 승리할수 있었으며, 베트남은 강자에 대항하는 약자의 전술, 즉 게릴라전을 추구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소규모 전쟁"을 의미하는 스페인어에서 나온 말인 게릴라는 (나폴레옹전쟁당시 스페인) 결정적인 전투에서 그들보다 강력한 적을 패배시킬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대신 그들은 직접적으로 적군과 교전하지 않고도 적군을 제압할 목적을 갖는 일련의 소규모 작전에 의존한다. 일단 적군이 그들의 우세한 힘을 가동시키면 게릴라는 치고 빠지는 식으로 차단해 가면서 전장을 재래식 군대에게 넘겨준다. 재래식 군대는 기를 꽂고 승리를 선포한다.

 게릴라와 싸우는 군대는 종종 전통적 의미에서의 "중단없는 승리"를 기록할 수 있다. 게릴라는 거의 항상 "패한다"

 

 

 하지만 게릴라와 싸우는 군대의 승리가 최종적인 승리로 연결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패배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게릴라전을 수행한 체게바라는 게릴라전을 미뉴에트에 비유했다. 미뉴에트란 춤에서 댄서는 몇 발자국 나가다 뒤로 물러선다. "뒤로 물러서는 것" 이것 자체가 게릴라에게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게릴라는 자기들이 쉽게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근거지를 장악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전진한 후에는 항상 후퇴해야 한다. 그들은 전사자,부상자, 보급품을 수집해야 하고, 훗날 싸울수 있도록 조직을 재정비해야 한다. 재래식 군대가 자신들은 항상 승리하고 있고 게릴라들이 "최후의 패배"를 당하는 것은 오직 시간문제라고 항상 주장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릴라의 승리는 적을 물리적-심리적으로 약화시키는 오랜 투쟁뒤에만 비로서 온다. 게릴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원을 충원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그들의 대의명분이다. (그래서 현정부 전복 보다는 독립투쟁이 더 쉽다. 물런 반독재투쟁또한 대의명분으로서 강력히 작용할수 있다.)

 

재래식 군대에서 투쟁은 순수하게 군사적인 성격을 갖지만, 성공적인 게릴라 운동은 항상 투쟁의 심리적- 정치적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 프랑스군의 보네 대령은 이것을 수학공식처럼 표현했는데 혁명투쟁(RW)= 게릴라행동(G)+심리적정치적활동(P)이란 것이다.

 

 베트남에서 프랑스군은 일반적 우위를 장악했고 승리할 것이란 예측이 계속해서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다. 베트남군은 항상 다시 나타나서 싸웠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단기간의 작전으로 의도했던 전쟁은 오래 계속 되었고 비용도 많이 드는 소모전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모든 전쟁은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갖기 때문에 전쟁초기에 프랑스 여론의 지지는 해가 지남에 따라 (재정부담의 증대에 따라) 여론의 불만도 상승하게 되었다.

 

 특히 베트남은 혁명은 내생적인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조장된다는 견해의 의문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소련은 베트남에 원조를 조금도 제공하지 않았고, 중국공산당이 1949년 권력을 잡았을 때 호치민은 중국의 보급품을 특히 야포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프랑스군에 대항하는데 중국군을 이용하는데 거부함으로써 성공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년간의 싸움의 끝은 디엔 비엔푸 공격의 유인책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월등히 우세한 화력과 공로와 디엔비엔푸에 이르는 육로의 제어라는 조건과 함께 제자리에서 재래식전쟁을 하기로 하였다.  보 구엔지압 장군은 이 미끼를 이용해 중포대를 투입한 결정적 전투를 시작했고, 프랑스는 미국의 개입을 호소했지만 거부했다. (아이젠하워의 보좌관 일부는 핵에 의한 타격을 촉구했으나 아이젠하워는 핵무기는 파괴무기이지 전투무기는 아니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거부했다. )

 

 디엔 비엔 푸 전투는 1954년 봄에 발생했고, 5월초 프랑스 수비대가 붕괴되었으며, 프랑스는 패배하였다.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후속으로 제네바협정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처음 베트남의 분할을 주은래가 제안했으며 베트남은 13도선을 고집했지만, 중국의 압력에 의해 17도선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또한 환송연에서 주은래는 남베트남 대표에게 자기는 영원한 베트남의 분할을 지지한다는 점을 시사했다.)

 

 

 

프랑스의 이탈

 

프랑스 식민정책은 영국과는 다른데  그것은 프랑스 식민정책의 목표때문이다.

프랑스 식민정책의 목표는 아프리카 식민지를 프랑스제국에 동화시키고 아프리카 원주민을 프랑스시민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흑인들은 "우수한" 프랑스 문화를 지지하고 자신의 문화를 포기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들은 프랑스 말과 문화를 배웠고 그들 가운데 엘리트는 프랑스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독립에 대비하도록 하는 노력은 전혀없었다. 하지만 식민지들이 프랑스제국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들은 선출된 대표를 파리에 보낼 수 있었고, 그들은 프랑스 의회에 의석을 보유했다.

 

프랑스 동화 계획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주민이 "프랑스화" 하기를 원하고 사실상 다소는 프랑스화했다고 가정하는 점에서 항상 문제가 있었다. (중국이랑 이것은 비슷한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 소수민족들이 그런식으로 생각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특히, 알제리의 경우 이슬람교도인 아랍인의 동화는 프랑스에서 온 정착민과 아랍인이 거부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아랍인들은 항상 자기들은 정복당한 신민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도 비슷한데 흑인 아동들이 "우리 조상 골족은 푸른 눈과 금발을 가졌다" (이게 말이 되나;) 를 복창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 파리가 상정하고 있는 동화는 인종주의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민족 중심주의적인 것이다. 프랑스와 프랑스식민지의 대프랑스연합은 평등의 토대 위에서 그리고 문화적- 인종적 다양성의 인정 위에서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전후부터 1950년중반까지 프랑스의 어떤 내각도 아프리카인의 자치요구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시아에 있는 식민제국을 포기한 이후 프랑스는 알제리 혁명운동과 아프리카 내 다른 식민지에서 독립요구에 부딪혔다. 알제리는 프랑스가 거부했기 때문에 예외로 두고 나머지에선 프랑스는 동화를 고집하지 않고 적용가능한 대안을 찾았다.

 

-> 결국 아프리카는 독립했는데 그 과정도 사실 복잡하지만 생략하겠다.

 

 

알제리에서의 프랑스 투쟁

 

1954년 베트남에게 패배했을때 프랑스인들의 대부분은 베트남의 상실을 크게 비난하지 않고 수용했다. 그러나 알제리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강대국정치 ("강자는 그들이 할수 있는 것을 강요하며, 약자는 그들이 해야만 하는 것을 승락하는 것이다."), 식민주의, 인종주의는 히틀러와 2차 세계대전이후 불신된 주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알제리는 하나의 식민지가 아니라 알자스,로렌,프로방스가 프랑스 지역인것과 똑같이 지중해 건너편에 있는 지역인 프랑스에 통합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알제리 통제는 백년이상 되었고, 알제리는 스스로 프랑스에 살고 있다고 간주하는 100만 프랑스 시민의 보금자리 였다.

 

 수상 멘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알제리 지방은 공화국의 일부를 이룬다. 그 지방은 오래전부터 프랑스였고, 알제리와 본토 사이의 분리란 결코 생각조차 할수 없다...  프랑스는 이 근본적인 원칙에서 물러 나지 않을 것이다."

 내무장관 미테랑은 "알제리는 프랑스다"라고 덧붙였다. (John Talbott, The War Without a Name : France in Algeria,1954-1962  p39 )

 

 

 프랑스인들은 알제리인들을 문명화시키는 것이 식민정부의 사명의 일부라고 정당화 했지만 프랑스 민주주의는 알제리에 있는 유럽인들에게만 의미가 있었지 토착적인 아랍의 이슬람교 주민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 (1919-1939)  자유주의자인 프랑스인들과 알제리인들은 먼저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여 이슬람교도인 알제리인들을 프랑스사회에 통합시키기로 촉구했으며 1936년 프랑스 수상 블룸이 법안을 제안했지만 그것은 부결되었고, 알제리가 프랑스의 한 지방이라는 가설은 프랑스 문명과 뚜렷이 구별되는 이슬람교도이자 아랍적인 알제리란 실제와 충돌했다.

 

 프랑스 사회에 알제리를 통합하는 일은 소수인 자유주의자에 의해 추구된 꿈같은 계획이었고, 이것은 알제리에 있는 프랑스 정착민, 아랍인들 모두 거부했다. 

Abdelhamid Ben Bandis 는 Tanya Matthews, War in Algeria : Background for Crisis 에서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인이 아니고, 프랑스인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으며, 프랑스인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될 수가 없다." 라고 썼다.

 또한 무슬림학교는 "이슬람은 나의 종교이다. 아랍어는 나의 언어이다. 알제리는 나의 조국이다. " 를 암송하도록 가르쳤다.

(Ibid, p20 - 이책은 잘모르겠음)

 

 

 2차대전자체가 파시즘,인종주의,식민주의에 반해서 치러진 전쟁이기 때문에 그 전쟁의 종식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요구한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1945년 5월 1일 알지에 노동절 환영식에서 시위자들은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행진을 했고,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의 지배를 비난하고 알제리의 독립을 요구하는 기치를 내걸었다. 시위를 저지하려는 프랑스의 시도는 알제리인 10명과 프랑스인 1명의 사망자를 낳았고,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모든 무질서를 종식시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1주일 뒤 1945년 5월 8일 알제리 세티프에서 열린 유럽 전쟁 승리 환영행사는 폭동으로 변했고, 알제리인들은 알제리의 독립을 요구했고, 한 젊은이는 알제리기를 내걸었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이것으로 알제리에서 반식민주의적 반란이 촉발되었다. 프랑스는 중무장한 경찰과 군대를 전투로 몰아 넣어, 항공기는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에 기총소사를 했으며, 전함은 연안의 토착민들에게 포격을 가했다. (이때 영국인들은 비행기를 제공해서 프랑스,모로코,튀니지로부터 프랑스 군대를 실어 날랐다. )

 

 전투가 끝난후 프랑스인들은 대량의 체포를 하였는데  프랑스의 공식집계에 따르면 1165명, 알제리의 추계에 따르면 45000명의 아랍인들을 살해했다. (유럽의 중국? ... Frantz Fanon , A Dying Colonialism  p74)

 미국의 OSS 즉 전략 정보국은 희생자 숫자를 6000명의 사망자를 포함 16000- 20000 으로 잡고 있다. ("Moslem Uprisings in Algeria , May 1945" ,Record Group 226, Oss Reserach & Analysis Report 3135, May 30 ,1945,  pp1-6 , National Archives, Washington D.C.)

 

5월 13일 프랑스인들은 콘스탄틴에서 군사행진을 벌여 알제리인들에게 그들의 승리를 결정적으로 인식시켰다.

프랑스인들은 알제리인들의 반항에 대한 대응에서 의견이 일치되었고 결의가 확고했다. 파리에서 모든 정파의 정치인들이 알제리에서의 반란진압을 강력히 지지했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폭동이 부분적으로 식량부족의 결과였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반란이 프랑스의 알제리지배에 대한 뿌리깊은 반목으로 부추겨졌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9년동안 알제리는 상대적으로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1954년 11월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또다른 반란에 부딪혔다.

이번 투쟁은 격렬했다. 혁명은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조직되었는데 민족해방전선은 약자의 전통적인 무기인 테러(어쩌면 게릴라전)로 돌아섰다. 테러리스트들은 군사력이 막강한 적을 패배시킬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진 않았다. 대신에 상대방의 의지를 꺽으려는 희망에서 협박을 시도하고 투쟁력은 유지하려고 했다. 1956년 의회는 (공산당을 포함해서) 제 10공정단의 Jaques Massu 장군에게 필요한것은 무엇이든지 할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고 이로써 "알지에전투" 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민족해방전선 조직의 파괴로 끝났다. 일년이 안되어 식민지 봉기는 끝난 것 처럼 보인것이다.

 

하지만 반란은 새로운 지도자들이 출현함에 따라 계속 되었다. 프랑스인들과의 협력을 추구했었던 아바스 같은 알제리인들이 반란에 가담했다. 프랑스의 군사력은 초기에 5만에서 40만으로 늘어났으며 유혈과 잔혹행위가 계속되었다. 결국 900만의 인구중 200만의 아랍인들이 피난민이 되었고, 100만명이 죽었다.

 

 프랑스에선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제리가 결코 프랑스로 될수 없다는 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1950년 말, 1954년에는 알제리 문제에 대해 통일되었던 프랑스인들이 알제리 문제에 대해 심각한 논쟁을 시작했다. (알제리에 있는 프랑스인들은 그런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고려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전쟁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 프랑스사회의 분열 (반대중 하나는 반복되는 가혹행위가 프랑스군의 범죄행위에 종사해야 하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쟁중 미국 시민과 비슷하게... 살해,야만성,고문의 충격이 아랍인에게 가하는 것보다 그들 사회에 미치는 결과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계속되는 투쟁의 비용이 이득을 능가하자.. 많은 사람들이 알제리를 포기할 때가 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알제리 문제는 내전의 위기까지 몰고 왔고 그것은 결국 드골이 1958년 6월 프랑스의 새로운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다,

 

처음 드골은 모든 프랑스 정부가 거부했던 것을 알제리인들에게 제안해서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다. 아랍인과 유럽인 사이의 불평등 수정과 모든 알제리인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주는 기초 위에서의 선거 - 단, 알제리는 프랑스의 한부분.. 하지만, 1954년 반란 이전엔 효과가 있었을 지도 모르나 이제는 거부되었다. 근본적인 혁명 논리와 완전독립에 못 미치는 어떤 것도 이루어질수 없었다. 드골은 반란의 분쇄와 철수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철수를 선택했다.

 

1960년 여름 드골은 "알제리인에 의한 알제리"를 공개적으로 말했고, 알제리원주민은 프랑스인이고 알제리는 프랑스의 일부분이란 신화를 버려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이해했다.

 

1962년 7월 드골은 군부안의 반대와 알제리 정착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알제리를 포기했으며, 알제리는 공개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 종식과 함께...

 

 

ps. 프랑스내 정치토의의 쟁점 - 알제리의 운명 .. 프랑스의 알제리인가 알제리인들의 알제리인가..

1947년 드골 "프랑스의 주권 "강조.. "이것은 알제리가 국내서든 국외서든 어떤식으로도 의문의 여지 없이 프랑스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 드골 Samuel B. Blumenfeld's epilogue in Michael Clark, Algeria in Turmoil : The Rebelion, Its Causes, Its Effects, Its Future  pp 443- 454 참조